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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공간: 인천 Photos by 양승욱
기억하기는 언제나 실패한다.
물끄러미, 시절에 아껴두었던 것을 꺼내어 기억해본다. 애틋했던 마음, 계절의 내음, 풍경 속 전해지는 소리, 상대방의 눈빛과 미소를 떠올려본다. 허나, 자세히 떠올리다보면 사실 아름답다 여겨졌던 모든 것의 균형이 이미 무너지고 있다. 지금은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인연에게 우리의 기억이 같은 지를 이제는 물을 수 없다.
곁에서 지켜볼 수 없음은, 볼 수 없는 일이며 텅 비어 있는 것이다. 죽음을 실감하는 일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뜻하며, 기억은 언제나 죽음의 자리를 품고 있다. 기억의 실패와 오류가 반가운 것은 제 각기 다른 기억 조각들이 모여, 환상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 환상성을 완료하기 위해, 가두기 위해, 끝내 실패할 기억이 우리를 쓰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나의 첫 쓰기는 유년의 기억을 잃으면서부터다. 최초의 기억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을 일기장에 숨겨두었고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자신의 의식보다 빨리 커져버린 몸, 몸과 몸이 아우성치며 나의 의식과는 다르게 움직일 때, 분열되는 의식과 몸은 마음의 크기를 결정한다. 유년의 기억이 자꾸 흐릿해지는 이유는 그 기억을 마주하기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의식보다 앞서 성장해버린 육체는 자기 자신을 배반하듯 움직였고, 아직 말을 알지 못하는 감각들이 이름 없이 어지럽게 내 안에 남아 있었다. 그 시절의 몸은 단지 반응할 뿐이었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설명해주는 이들의 말은 나의 감각보다 늘 앞서 있었기에, 나는 자주 뒤처졌고, 자주 납작해졌고, 그래서 자주 멈춰 섰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설명되지 않은 감각들, 정의되지 않은 눈물과 소리들이 내 유년을 이루었고, 그것들은 자주 흐릿하고 자주 비틀린 채 남는다. 흐릿한 것은 가끔 아름답고, 자주 무섭다. 내가 쓰기 시작한 건 그 무서움을 어떤 형상으로든 묶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억은 늘 어긋나고, 지금의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던 그 시절의 나를 불러오려 할 때마다, 나는 실패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실패 덕분에 환상은 남는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기에, 나는 다시 그때를 상상할 수 있고, 그 상상의 여백 속에서, 나는 나를 만든 최초의 장면을 다시 지어볼 수 있다.
유은의 <서로가 서로를 듣는다>(2025)는 2024년도 개인전 <당신에게>와 궤를 이루는 전시로, 두 전시는 소멸과 상실의 자리를 맴돌고 있다. 작년, 유은이 붙잡아 두고 있는 기억을 따라 비가 멈추지 않는 바닷가로 향했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을 목격하며, 보이지 않는 수많은 죽음이 우리 삶을 그림자 에워싼다는 걸 느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의 임무가 기억을 등불삼아, 잃어버린 것을 목록화*유디트 샬란스키 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은은 현재 아이들을 가르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장소에서 ‘학교’라는 제도적 공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클 것이다. 교육자로, 예술가로서 유은에게 기억은 쓰기이며, 그것은 영원하지 않은 관계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방식이다.
쓰기란 환상을 보존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게 아니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지워내지 않고 꺼내놓는다. 쓰기는 그래서 실패한 기억의 잔해 위에 남아있다.
빗소리를 따라 걸으며, 어린 나를 찾았다. 어린 나의 장면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면서도 정확히 알지 못했고, 감각했으나 해석하지 못했으며, 받아들였으나 남기지 못했다. 내 몸은 수동적으로 움직였고, 내가 나를 알아차리기 전부터 이미 나는 움직이고 있었기에, 나는 한참 뒤에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쓰기란 그 말할 수 없던 시간들의 어딘가를 다시 더듬는 일이다. 그 더듬거림이 반복될수록 나는 조금씩 나에게 가까워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가까워짐은 늘 아득하고, 그래서 쓸 수밖에 없다. 끝내 실패할 줄 알면서도.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나를 어느 장면으로 이끈다. 오래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운동장에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간이 겹쳐진다.
나는 그제서야 삶이란 상실과 소멸을 반복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글: 강정아)
일상에 애도의 감각이 깃든다. 우리 사이에 다가올 상실과 이별을 돌본다. 이는 오롯이 슬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랑에 가깝다. 일상에서 ‘나’ 너머의 타자와 사건에 몸과 감각을 기울여 슬퍼하고 사랑하는 의식을 행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관계의 변화가 만들어질까? 이별을 마주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관계를 감각한다면, 예기치 않을 헤어짐을 마주하더라도 조금은 덜 무력하고, 조금은 덜 허망할 수 있을까?
애도의 감각이 사랑과 돌봄의 기저에 자리할 때, 나와 당신 사이에는 서로의 호흡을 기다리고 마주할 틈이 생겨난다. 그 틈에서 누군가는 조금 더 살아갈 것이고, 조금 더 살아가기로 한 누군가의 다짐은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릴 것이다. 동시에, 누군가는 다가오는 죽음을 예비할 것이고, 곁에 선 누군가는 타자의 죽음을 기억하는 매개체가 되기를 다짐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그간 발견하지 못했던 관계적 존재의 가능성들이 탄생한다.
초등학교. 학교는 ‘국가’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시스템인 동시에, 수많은 인격적 주체들이 넘나드는 구체적인 장소이다. 나는 그곳에서 ‘교육자’의 직업정체성을 가지고 매년 새로운 어린이 들을 만난다. 내게 있어 학교는 노동 공간일 뿐만 아니라 우정을 나누고 돌봄과 연대의 감각을 공유하는 장이기를 바라는 곳이기도 하다. 학교라는 근대적 시스템 안에 들어온 동시대의 어린이 들이 아주 조금이나마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염원한다.
작가 | 유은 @un_uniq 협력 기획 및 서문 | 강정아 @hysterian.public 워크숍 협력 | 오로민경 @00_baahram 비평 | 안팎 @thou.shalt.not.pass 영상 | 헤즈 스튜디오 @hez_studios 사진 | 양승욱 @yang_seungwook 디자인 | 김보라 @deer_studio_in